[사연을 담다] 최태명 장로 – 효

선생님과 좀 가까이 있을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선생님께서 “아버님 뭐하셔?” 이렇게 물으시는 거예요.

“네 아버님 바다에서 김 농사 짓고 있습니다.”
“그럼 전화는 자주 해?”

이러시더라고요.
제가 특히 전화를 좀 자주 안 하거든요. 전화를 잘 안 하는 불효자식인데

‘어떻게 아셨지?’
“전화 자주 안 합니다.”

말씀드렸는데
선생님께서 부모님한테 자주 전화하고 자주 부모님께 보고 싶다고 그러고 부모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하고 그렇게 자주 전화하라고 말씀해주셨어요.

또 말씀을 들었으니까 실천을 했어요. 평소에 전화 안 하던 제가 집에 아버님께 전화도 자주 드리고

“아버지 이제 제가 나와서 조금이라도 경제생활을 해보니까 참 어렵고 힘듭니다. 아버지 정말 저를 키워주시느라고 정말 많은 고생 하셨다고 너무 감사하다고.”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아버님이 굉장히 흡족해하셨어요.

“네가 어떻게 그런 것을 알아?”

이러시더라고요

어떨 때는 저기 한번 옥천 시장에 한번 들르셨어요. 옥천 시장에 들르셨는데 그날이 장날이었나 봐요. 사람들도 많고 한데 장을 보시면서 붕어빵을 사셨어요. 붕어빵을 사시고 호떡도 사시고 그러시면서 이거 어머니께 갖다 드리신다고 붕어빵을 사시더라고요.

‘어떻게 붕어빵을 저렇게 사다 드릴 수 있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선생님의 그 순수한 모습이 너무너무 감동이 되었어요.

‘어떻게 비싼 거 이런 거 안 사가시고 붕어빵을 사 가실까?’

굉장히 좀 의아스러웠는데
그런데 월명동 오셔서 선생님께서 어머님께 붕어빵을 드렸는데 어머님은 또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뭐 비싼 거 안 사고 오셔도 그래도 자식이 뭐라도 가지고 오는 거 있잖아요. 그런 거를 부모님은 좋아하시는 거더라고요.

항상 뭐 큰 거는 아니구나.

저렇게 부모님께 효도하는 모습이 우리도 평소에 조그맣게라도 조그만 사탕 하나라도 어머니께 아버지께 드리면서 저희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아버지 어머니 저희들 지금까지 키우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냐고 이런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야 되겠다

라는 것을 그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어떤 그런 삶이 저희들 한테 같이 스며들어오고 배우게 되니까 저희들도 그때 그러한 아버지한테 효도의 말을 전하지 못했더라면 아마 지금도 후회스러웠을 겁니다. 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하는 거잖아요.

내가 부모님 마음 못 알아드리고 부모님께서 그때 고생하셨던 거, 자식 키우면서 고생하셨던 것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하지 못하고 후회하면서 살았을 텐데 그래도 그때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셨던 부모님께 아버님께 전화 자주 드리라고 하셨던 그 말을 실천하고 나니까 지금은 참 생각해보면 후회스럽지가 않아요.

“야 내가 그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너무 그때 나는 20대였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그런 철이 없던 시기였어요. 그런데 선생님의 그 말씀이 없었더라면 저는 아마 그런 말을 못 드렸을 거예요. 그래서 지금 항상 생각해보면 그게 지금도 자랑스럽고 속이 후련하고 선생님께 항상 감사한 마음 간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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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을 담다] 잊을 수 없는 이야기,박종일 장로

 

“끝까지 함께 해 주는” 본을 보여주신 정명석 목사님

대학교 2학년 때 전도가 되었는데 4학년 졸업할 때 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아버님은 제가 대학교 입학했을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머니보다 할머니께서 저를 더 좋아해주셨어요. 그런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니까 마음이 조금 심란했어요. 그래서 마음을 좀 정리할 겸 월명동으로 갔습니다. 그때는 건물이라든지 자연성전이라든지 이런 게 하나도 없을 때였어요.

월명동에 왔더니 정명석 목사님이 제자들과 같이 일을 하고 계셨어요. 정명석 목사님께서 일하는 모습이 정말 낯설게 느껴졌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정명석 목사님을 따르는 종교 지도자 격인 분이신데도 일을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손수 다 하시더라고요.

제가 예전에 조직사회에서 계속 있다 보니까, 지위에 계신 분들은 지시만 하는 걸 보거든요. 지시를 하고 명령을 하달하고 그런 식으로 일이 이루어지는 게 당연시됐었어요. 그런데 정명석 목사님께서는 직접 나무를 낫으로 베는 것도, 돌을 하나 쌓는 것도, 흙을 치우는 것도, 삽질을 하고 낫질을 하는 것도 본인이 다 하시더라구요. 보통 이렇게 높으신 분들이 일을 하게 되면 잠시 일을 하는 본만 보여주고 가잖아요. 그런데 아침에 일을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함께 일을 하시는 모습이 사실 저로서는 굉장히 이상했어요. ‘어떻게 저렇게 일을 하시지? 자기 농사짓는 것도 아닌데…’ 라고 생각했어요.

 

감사하는 마음이 끝까지 가는 정명석 목사님의 삶

그러다가 중국에 있을 때 정명석 목사님께 가까이 갔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에도 집을 고치는데 보통 일하는 사람들은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고 나서 청소를 하잖아요. 어차피 내일 또 일을 하기 때문에 어지럽혀진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날 저녁에 일을 마치고 나서 정명석 목사님이 작업장에 오셨어요. 정명석 목사님께서 맨손으로 장갑도 안 끼시고 먼지를 쓰레받기로 다 담으면서 청소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정명석 목사님께 물어봤어요.

“선생님, 왜 이렇게 청소를 하십니까? 내일 아직 작업 할게 많이 남아있습니다.”
“하나님이 나한테 이 집을 주신 것이 너무 너무 감사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하기 때문에 이렇게 청소를 한다.”

그래서 ‘정명석 목사님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이 하나님이 주실 때 뿐만 아니라 끝까지 가시는 구나.’ 라고 깨달아졌어요. 매일 생각해서 감사하면 받은 것을 아끼잖아요. 주신 거에 대해서 귀하게 여기면 화초 하나도 내가 쓰다듬고 이파리 하나도 닦고 그러잖아요? 정명석 목사님은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마음이 진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잊을 수 없는 마음, 나를 사랑해주시는 주님

제가 선박회사를 다닐 때 해외를 다니는 화물선을 10년 이상은 탔어요. 신앙생활을 하다 떠나 있다 보니까 주일예배도 못 드리고, 누가 전화로 말씀을 전해준다거나 할 수가 없었어요. 8개월~10개월 지나 휴가를 받으면 그 때만 한번 교회에 가볼 수가 있는 거예요.

신앙생활을 못하다보니 게을러지고, 나쁜 행동을 하게 되더라고요. 왜냐하면 주변에 다 그래요. 동남아시아 같은데 가보면…그러다보니까 유혹이 들잖아요?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제 입장에서는 굉장히 그게 마음의 짐이었어요. 내가 하나님께 회개도 하는데 ‘가장 존경하는 정명석 목사님을 만나게 되면 고해성사하는 마음으로 고백을 한 번 해야겠다.’라고 생각했어요. 중국에서 정명석 목사님을 뵈었을 때 ‘기회는 이 때다.’라고 생각하고, 내가 이걸 다 말하고 회개를 해야 되겠다 결심했어요.

그 때 아침 모임을 마치고 나서 정명석 목사님 앞에 갔어요.

“선생님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
“뭐냐?”
“사실은 제가 10년 동안 배를 타다보니까, 이만 저만 참 못할 짓은 아니어도 못 볼 것도 많이 보고 조금… 나쁜 짓도 많이 했어요. 그래서 회개를 해야 되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옛날에 있었던 얘기 몇 가지를 쭉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는데 정명석 목사님이 갑자기 제 손을 잡으시더니 얘기를 다 들으시고 제 눈을 바라보시고 계시더라고요.

“너 주님 사랑하잖아? 그러면 됐어. 앞으로 잘해.”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어려우면서도 ‘하나님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겠지. 주님이 나를 도와주시겠지’하는 마음으로 늘 있었어요. 정명석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내 마음을 알아줬다는 것에 너무 고맙더라고요. 그렇게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서 인식시켜 주니까 더 회개가 되었어요.

‘내가 앞으로 살면서 더 잘해야 되겠구나.’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내가 더 잘해야지!!’

지금도 그 마음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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